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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편지1

by K교수 2020. 11. 12.

#연애편지 #사춘기 #첫사랑

희한하게 초등학생 때까지 그렇게 여자한테 관심이 없다가

사춘기가 되니 불과 몇 개월 전까지 아무 관심 없던 여학생이 다르게 보인다.

남녀 칠 세 부동석이라고 내가 다니는 지역에 남녀공학 학교는 하나도 없었다.

나중에 신생 중학교가 개교하고 최초로 남녀공학이 생겼는데 그것도 남녀 따로 반을 운영한다고 했다.

지금 기준에서 보면 학교는 또 왜 이리 멀리 있는지

버스를 타고도 한참을 갔다.

하지만 아침 일찍 일어나 만원 버스에 몸을 싣는 것이 싫지만은 않았다.

버스 안에서 역사는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때 버스는 남녀학생들의 또다른 만남의 장소이기도 했다.

만원 버스에서 급커브를 돌 때쯤 여기저기 비명소리가 들린다.

짓궂은 친구들은 오히려 이러한 때를 기다리기도 했고 즐기기도 했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서 그런 식의 원치 않는 스킨십은 사나이로서 용납할 순 없는 일이다.

중1 무렵부터 이미 키가 거의 170을 넘었던 나름 큰(?) 키로 버스의 가장 위의

봉을 잡은 채 온 힘을 다해 버텨냈다.

뭐 꼭 여학생들에게 멋있어 보이려고 했던 행동은 아니다. 조금 의식은 했지만 나름 진지했던 나는

나만의 품위를 지키고 싶었다.

그렇게 중학교 입학한 지 한달이 넘었을 때쯤 초등학교 동창 여학생을 버스 안에서 보았다.

서로 안부를 묻다가 그 동창 여학생이 나한테 해줄 이야기가 있다고 했다.

"기호야 너는 좋겠다~ "

" 왜? 갑자기 무슨 소리야."

" 너를 엄청 좋아하는 여자애가 있어.너를 너무너무 좋아하는 여자애가 하하 ."

"응?? .."

당황한 나는 순간 얼굴이 붉어졌다.

누군가 나를 좋아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왠지 가슴이 뛰고 부끄러웠다.

" 기호야 그 여자애가 나 3학년 때 같은 반이었는데 너네 집 전화번호를 알려고 우리 집에서 몇 시간을 기다렸다는 거야. 어떻게

전화번호를 알려고 몇시간을 기다릴 수가 있지??그래서 너무 정성이 갸륵해서 내가 너네 집 전화번호 알려줬어. 전화 오면 그 여자 애인 줄 알아."

"니가 왜 우리집 전화번호를 알려주고 그래."

아무튼 그게 무슨 일이라고 괜히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그 소녀 때문에 그날은 줄곧 가슴을 콩닥이며 지냈다.

저녁을 먹고 난 뒤 갑자기 집에 전화기벨이 울린다.

어머니가 받으려는 것을 후다닥 뛰어가서 먼저 받았다.

"여 여보세요.."

" xx한테 얘기 들었지요? 저는 00라고 해요..

"아 네에.. 아 ..."

"...."

"......."

몇십 초간 서로 침묵이 흘렀다.

그쪽도 어떻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고

나도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전혀 몰랐다.

그냥 얼굴만 빨개지고 당황할 뿐..

"저기 매일 7시 30분 버스 타시죠? 그쪽은 저를 몰라도 저는 그쪽을 잘 알거든요.. 저는 그쪽이 너무 마음에 들어요"

"아.... 네에...".

" 내일 버스 탈 때 아는 척 하면서 제가 인사할 테니 그때 봐요.."

" 아.. 네에..."

옆에 계시던 어머니가 누구냐고 묻는다.

''기호야 누군데 그렇게 전화를 받니?"

" 네에.. 그게... 잘 모르는 사람이에요."

" 그런데 왜 모르는 사람이랑 오래 통화하니?"

" 네.. 그게..."

사태를 이미 파악하신 어머니께서 바로 훈육에 들어가신다.

"기호야 너한테 전화한 사람 여자애지? 지금은 공부할 때다.너는 지금 그 여자애가 말할 때 한마디도 제대로 대답도 못하더라,

너보다 훨씬 성숙한 여자애고 연애는 좋은 대학 가서 실컷 하면 된단다. 엄마말 명심해라."

아무튼 그 뒤로도 어머니는 수십 분간 여러 말씀을 더 해주셨다.

나는 이성 교제는 당연히 절대 안 할 것이라고 말씀드리고 어머니를 안심시켜드렸다.

나는 마음속으로 얼굴도 모르는 소녀이지만

한결같이 고생하시고 나만 믿으시는 어머니를 생각하면

그냥 이건 없던 일로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다음날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기대감에 그날은 잠을 설쳤던 것 같다.

다음날 여느 때와 같이 일어나서 등교 준비를 했다.

뭐 특별하게 더 꾸밀 것도 없었다.

멋을 부릴 줄도 몰랐고, 내가 입고 있는 옷은 아버지가 젊은 시절 입었던 옷을 고쳐서 입던 옷이었다.

머리도 집에서 어머니가 깎아 주셔서 조금 듬성듬성한 부분이 있는 까까머리였다.

하지만 그런 게 특별히 부끄럽다든지 의식을 하거나 그런 건 전혀 없었다.

다만 지금 돌이켜 보니 그런 나보다 멋쟁이도 많았을 텐데 왜 이런 나를 좋아했을까 궁금해서이다.

7시 30분 버스를 탔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조금은 진정시키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누굴까? 과연? 그 여자애는...

뒷문에 기대어 있는 큰 키, 얼굴이 하얀 여자애가 손짓을 한다. 나라고 하면서

그리고 나에게 편지를 하나 준다. 집에 가서 꼭 읽어보라고.

생각보다 키도 크고 나보다도 훨씬 성숙해 보이는 외모이다.

말을 안 했으면 고등학생인 줄 알았을 것이다.

누나 같은 느낌이 드는 그런 여자애였다.

그냥 인사만 했다. 그 여자애가 내릴 동안 한마디 말도 못 붙였다.

너무너무너무 부끄럽고 어떻게 해야할지를 모르겠다.

그 여자애는 나를 의식했지만 역시나 나에게 말은 걸지는 못했다.

학교 수업에 집중이 전혀 안된다.

차마 학교에서 편지를 뜯어보지 못했다.

집에 돌아가자마자 편지를 뜯어 읽어보았다.

지금 그 내용은 자세히 기억은 안 나지만 꽤 긴 내용이었고

등교버스에서 나를 늘 지켜보았다는 내용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사귀고 싶다고..

아 맞다 답장을 기다린다는 내용이 있었다.

집에서 어머니가 차려주신 저녁을 먹었다.

눈치 빠른 어머니는 내가 저녁을 먹는 동안 벌써 내가방에서 편지를 발견하셨다.

어머니는 또다시 1시간가량 이런저런 말씀을 하셨다.

그래 힘드신 어머니를 생각해야지 철없이 내가 여자애를 만날 때인가?

다시한번 마음 접으려고 했다.

그 뒤로 새로운 고민이 생겼다.

버스를 탈 때마다 그 여자애가 말을 거는 것이다.

그여자애가 아는 척을 하고 안부도 묻지만

그냥 속으로 마음을 접기로 이미 먹었기에

대답도 못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그 상황이 불편할 따름이다.

그렇다고 용기도 없어 확실히 노라고 말하지도 못했다.

집에 가면 종종 어머니께서 물으신다.

기호야 너 그 애랑 만나거나 연락하는 건 아니지?

네 그럼요 그런 일 없어요..

몇 주간 그렇게 버스 안에서 그렇게 어색한 인사와

어색한 침묵만이 흘렀다.

어느 날 그 소녀가 나에게 조금 다그친다.

아니 왜 나한테 말을 안 하냐고..답장은 안써줄꺼냐고.. 나랑 안사귈꺼야?

그 순간 화가 난 것도 아닌데 버럭 화를 내버렸다.

나 너 싫어, 그냥 너 만날 생각도 없고

편지 쓸 생각도 없어. XX 야..

나도 모르게 버스안에서 큰소리를 쳤다.

그냥 정말 싫어서도 아니고, 화가 나서도 아니다.

내 스스로가 아직 어리고 미성숙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을 뿐인데

이걸 이런 식으로 대응해 버렸다.

그 여자애의 멍한 표정과

큰 눈망울에 눈물이 고인다..

하지만 애써 그냥 모른척했다.

씩씩 거리며 버스에서 내렸다.

이미 수십 년 지난 일이지만

나의 첫 연애편지 사건은 이렇게 끝이 났다.

돌이켜 보면 나의 부족함으로 그 애에게 괜히 상처를 준거 같아 너무 미안하다.

그냥 정중히 거부할 수도 있고

아니면 그냥 좋은 친구로서도 남을 수도 있는 것인데

그때는 내가 그럴 준비가 전혀 안되었던 모양이다.

그 뒤로 그 소녀에 대한 소식은 들은 적은 없지만

아마 무척 나를 욕했을 것이다.

하지만 늦게나마 정말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다.

덩치만 컸지 너무너무 어리기만 한 내가

나보다 성숙하고 이뻤던 그대를 품기에는 한참 모자랐다고.

그래서 너무너무 미안하다고..

지금은 좋은 남자 만나 아들, 딸 잘 낳고 잘 살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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